작가 헤세

이미지 없음

Hermann Hesse(1877 - 1962)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성장에 대한 관통하는 듯한 대담한 묘사, 전통적인 인도주의의 이상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 
- 1946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


독일의 쉴러고문서협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발간물의 숫자로만 559종의 작품을 남겼다. 문학에 대한 헤세의 열정과 에너지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헤르만 헤세는 철학, 종교, 정의와 같은 이념들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지켜나가는 것이 자기 가문의 의무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어린 시절부터 억누를 수 없는 창조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 남편과 함께 인도에서 험난한 선교 활동을 했던 헤세의 어머니도 ‘이 4살의 아이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력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휴머니즘을 지향했던 작가 헤르만 헤세. 그의 작품은 성장하는 청춘들의 고뇌, 자연에 대한 동경,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양면성의 조화 등을 통해 인간 해방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광기에 가까운 열정 때문에 헤세는 신학교를 뛰쳐나오고, 자살을 기도하고, 일반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게 된다. 그 때의 상황은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결국, 헤세는 17세 때 칼브의 시계공장 견습공으로 취직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황과 탈선과 절망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커져만 갔다.

헤세는 14세 때 '시인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라고 결심하였다. 시계공장 일을 그만둔 헤세는 대학촌의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헤세는 서점의 고된 일과를 잘 견뎌내며 시와 작품을 쓰기도 하였고, ‘작은 문학회’라는 단체의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점차 안정되어 갔다. 그의 첫 시집 ‘낭만의 노래’가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며 헤세는 비로소 문학가로서의 성공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작가로서의 이름을 얻게 되자 그는 서점을 그만두고 9살 연상의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여 스위스 접경 지역인 가이엔호펜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여러 편의 작품이 성공을 거두었고, 헤세는 아들 셋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다 안정된 생활에 권태를 느낀 헤세는 싱가포르 ,수마트라, 실론 등을 여행하고, 인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유럽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썼다. 그리고 1911년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한다.

데미안(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우)



헤세는 평화주의자였다.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바로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뿐이다.’ 그는 조국 독일의 군국주의가 일으킨 제 1차 세계대전 때도, 히틀러의 나치즘이 광분하던 2차 세계대전 때도 전쟁을 반대하였고, 그래서 조국의 배신자, 매국노라는 언론의 지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저서는 판매금지와 출판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이러한 조국과 국민들의 비난은 헤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부친이 사망하고, 부인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고, 막내 아들도 병약하여 입원하게 되자 헤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 자신도 정신 치료를 받게 되고, 이것은 그의 남은 삶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헤세는 의학심리학의 대가였던 칼 구스타프 융 을 만났고, 닷새 후에 꿈속에서 바로 그 ‘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을 만났다고 한다. 헤세가 치료를 통해 정신적인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창작을 위한 영감을 얻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정신 치료를 받으면서 헤세는 나이 마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헤세는 스위스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을 서툰 솜씨로 그리며 문학 창작에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과 평안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는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것은 문학이 내게 주지 못했던 예술의 위안 속에 새롭게 침잠하는 것이다.” 
- 펠릭스 브라운(Felix Braun)에게 보내는 편지(1917) 중에서

헤세의 그림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다. 그가 그린 것은 오로지 말없는 산, 강, 풀, 이름없는 들꽃들,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들판에 누워 종일을 바라보았던 구름이었다.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정원사 헤세’ 단 한 작품뿐이다. 헤세는 스스로 화가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의 소박한 그림에는 따뜻함과 휴식이 있다. 헤세는 많은 수채화를 남겼으며, 그의 작품에 직접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또한 친구와 지인들에게 수채화가 그려진 편지와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에는 독일 유학 시절 헤세로부터 수채화 엽서를 받은 이야기가 적혀있다. 헤세의 수채화는 생전에도 엽서로 인쇄되어 상용되었고, 1920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파리, 마드리드, 뉴욕, 샌프란시스코, 동경, 삿포로, 몬트리올, 함부르크 등에서 여러 차례 수채화 전시가 열렸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마흔 이후 한 번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꺾어진 가지’ (헤르만 헤세 박물관 소장)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완성한 시 한 편과 수채화 한 점이다.

헤세의 후기 대표작인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는 히틀러에 의한 광란의 폭풍이 한창이던 암흑시대에 쓰였다. 죄악과 야만이 폭풍처럼 몰아치던 시기에 헤세는 이 작품 안에 평화와 자유의 유토피아를 창조한다. 이 책은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어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동서양의 음악, 문학, 철학, 신학을 종합하는 최고의 지적 유희가 펼쳐져 있다. [유리알 유희]는 1943년 스위스에서 발표되었고,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히틀러는 1945년 자살하였다.

85세를 살다간 헤세는 정원을 가꾸고, 토마토를 키우고, 낙엽 태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음악과 미술을 사랑했고, 평화와 자유와 사람을 사랑했다.